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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 위한 와인 가이드(마지막회) - 샤토 무통 로칠드 이야기 (월간조선)
‘예술을 위한 와인, 와인을 위한 예술’
 
⊙ 로스차일드家 소유의 샤토 무통, 2등급 판정 받은 지 118년 후 1등급 와인으로 격상
⊙ 필립 드 로칠드 남작, 와인을 생산자가 직접 샤토에서 병입 시작
⊙ 세계적 巨匠들의 名畵로 라벨 제작, 예술과 와인의 만남 시도
李京姬 대유와인 대표
月刊朝鮮 독자들과 함께 와인 이야기를 나눈 지 어느덧 열두 번째를 맞게 됐다. 2009년 신년호에 마무리 글을 쓰게 되어 어쩐지 의미가 있게 느껴진다. 어려운 경제상황 탓에 지난 하반기부터 ‘위기는 기회다’, ‘위기 극복의 방법은 창조경영’이라는 주제의 글과 강연들이 넘쳐나고 있다.

와인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며, 남다른 생각과 노력으로 새 역사를 쓴 인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와인을 예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린 바롱 필립 드 로칠드와 그의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의 이야기를 마지막 칼럼에 담고자 한다.
사토 무통 로칠드

샤토 무통 로칠드는 그 이름만으로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최고의 와인이며, 그의 이름에는 한편의 드라마가 있다. 세계 유명 예술가들의 그림이 망라된 와인 라벨, 무통의 과거와 현재를 지배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 필립 남작과 그의 무남독녀 외딸 필리핀 남작부인, 1855년 보르도 와인 등급체계에서 2등급으로 결정된 후 118년이 지난 1973년 1등급으로 격상시킨 집념은 와인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로스차일드(불어로는 로칠드, 영어로는 로스차일드)는 세계적인 유대인 금융재벌 가문이다. 현대 경제사, 정치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로스차일드 가문은 여러 권의 책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와인의 세계에서는 보르도 특1등급 와인 5개 중 2개(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로스차일드家(가) 소유다.

로스차일드 一家(일가)가 보르도의 샤토 매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세기 중엽의 사회 현상에 기인한다. 그 시절 산업혁명과 정치적 격변으로 큰 돈을 번 부자들이 와이너리를 소유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됐다. 로스차일드가에서 와인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나다니엘 드 로칠드(1812~1870)였다. 로스차일드가의 5형제 중 영국으로 이주한 나단의 막내아들 나다니엘은 작은아버지의 딸인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파리에서 살았다. 나다니엘 남작은 당시의 시류를 따라 1853년 보르도 포이약의 샤토 브란느 무통을 매입했고 샤토 무통 로칠드라고 명명했다.


1등급이 되지 못한 샤토 무통 로칠드

나다니엘 남작이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매입한 2년 후인 1855년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의해 보르도 특급와인 등급체계가 만들어졌다. 61개의 샤토가 1~5등급으로 분류되었으며 무통은 1등급이 되지 못하고 2등급이 되었다. 1등급은 4개 샤토에 불과했으며 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이 바로 그것이다. 품질과 가격 면에서 1등급 샤토에 떨어질 것이 없었던 무통이 1등급이 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영국인이 샤토를 매입한 것을 보수적인 보르도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유력했다.

1855년에 정립된 와인 등급체계는 단 한 번의 변화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그 단 한 번의 변화는 바로 무통이 1등급으로 격상된 것이다. 단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다니엘이 무통을 구입한 지 15년 후 숙부이자 장인인 제임스 남작(1792~ 1868)이 샤토 라피트를 매입하여 라피트 로칠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미 1등급으로 발표된 후라, 무통 매입가격보다 무려 4배나 비싼 가격이었다고 한다. 샤토 라피트를 소유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 제임스 남작은 샤토를 보지도 못하고 매입한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무통과 라피트는 같은 마을에 서로 이웃하고 있는 와이너리로 로칠드 일가가 소유하기 전부터 경쟁 관계에 있었던 와인이었다. 가족 간의 뛰어난 결속력과 우애로 유명했던 로칠드 일가는 와인 때문에 묘한 경쟁심을 불러일으켰고, 라피트 소유주는 대를 이어 무통을 1등급으로 격상시키려는 사촌들의 노력을 방해하게 된다.


샤토 무통 로칠드-거인의 등장
필립 남작과 그의 딸 필리핀 남작 부인.

  1870년에 나다니엘 남작이 죽고 그의 아들, 손자로 이어지며 샤토를 상속 받았으나 와인 생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증손자인 필립 드 로칠드(1902~1988) 남작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샤토 무통 로칠드도 없었을 것이며, 보르도 와인의 명성도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필립이 샤토 무통 로칠드에 처음 와 본 것은 1차 세계대전 중 보르도로 피란을 오게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유럽 최고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그는 많이 외로웠다고 한다. 전쟁 중 발견한 샤토 무통 로칠드의 고요함, 농부들의 친절함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됐고, 1922년 20살의 나이에 아버지에게 무통의 관리를 맡겠다고 요청한다. 주인이 돌보지 않은 이 샤토는 관리인이 이익을 착복하고 있었고, 장부상으로 손실만 계속되고 있었다.

필립 남작이 보르도에 내려와 2년 동안 와인 업계를 살펴본 후 큰 허점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을 양조한 다음 오크통째로 중간상인들에게 판매를 했고 와인의 숙성과 병입은 상인들의 담당하고 있었다. 와인이 샤토를 떠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립 남작은 포도 경작과 양조, 숙성, 병입까지 모든 과정을 생산자가 담당하지 않으면 품질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주장은 보르도 와인업계를 뒤흔들어 중간상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생산자들도 동조하지 않았다. 중간상인들이 매입을 해 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고 직접 숙성과 병입을 하자면 많은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러설 필립이 아니었다. 그는 메독, 그라브의 1등급 4개 샤토와 소테른의 특1등급인 샤토 디켐을 설득하여 ‘6개 샤토 동맹’을 맺고 ‘와인을 생산자가 직접 샤토에서 병입한다(mis en bouteille au chateau)’고 선언한다. 2등급이었던 무통이, 그것도 22살의 젊은이가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내 와인은 내 병에 나의 라벨을 붙여 나의 샤토를 떠나야 한다”라는 것이 필립의 주장이었고, 그것은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와인의 품질을 보증한다는 뜻이었다. 1920년대에 ‘와인의 샤토 병입’이 시작된 것은 1855년 와인 등급체계가 오늘날까지 흔들림 없이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브랜드 와인 무통 카데, 레드, 화이트, 로제 3종. 꼬마 무통이라는 뜻의 무통 카데는 베스트 셀링 보르도 와인이다.

1930년 보르도의 날씨가 나빴다. 와인을 맛본 필립 남작은 샤토 무통 로칠드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대신 ‘무통 카데’(무통의 막내)라는 이름으로 와인을 출시했다. 이러한 시도는 보르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이전에 세컨드 와인을 출시한 샤토들이 소비자들에게 퍼스트 와인과 세컨드를 혼동하게 한 나머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립 남작의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무통의 막내’라는 이름이 샤토 무통 로칠드와 구별되게 했고,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판매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나쁜 해가 계속되지 않았더라면 무통 카데도 한 번의 시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3년 연속 나쁜 빈티지로 무통 카데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에브리데이 와인으로 자리잡았고, 바롱 필립은 무통 카데를 계속 생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양조장 이름이 곧 와인 이름이 되던 시기에 최초의 현대적인 브랜드 와인의 탄생이었다. ‘로칠드’가에서 생산한 와인을 서민들도 마실 수 있다는 꿈을 준 무통 카데는 현재까지 베스트 셀링 보르도 와인으로 남아 있다.

1970년대 샤토 무통 로칠드의 1등급 승격을 반대하던 샤토 오 브리옹이 무통 카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승낙하겠다는 제의는 무통 카데의 인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名畵를 사용한 라벨
샤토 무통 로칠드 1987.

  1924년 필립 남작이 ‘와인의 샤토 병입’을 주장했을 때 라벨의 중요성도 부각됐다. 라벨은 새로운 중요성과 기능을 갖게 되었는데, 라벨은 곧 트레이드 마크, 출처 증명, 질의 보장, 포도원의 서명을 뜻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라벨은 중간상인이 마음대로 만들어 붙였기 때문에 생산자보다 판매상의 이름이 더 크게 들어가 있기도 했고 통일성이 없었으며 아름답지도 않았다.

1924년 빈티지가 출시되는 1926년에 필립은 유명한 그래피스트인 장 카를뤼에게 의뢰하여 자기만의 라벨을 만들었다. ‘모든 수확을 샤토에서 병입했다’는 문구와 함께 무통을 상징하는 양머리와 로칠드의 5형제를 상징하는 5개의 화살을 넣은 라벨은 너무나 혁신적이이서 보르도에서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필립은 ‘아름다운 라벨’에 대한 꿈을 접게 된다.

그의 시도가 다시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보르도에 돌아와서 첫 빈티지를 출시하면서부터다. 20세기 최고의 빈티지라고 일컬어지는 1945년産(산)부터 필립 남작은 매년 다른 예술가들의 그림으로 라벨을 만든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본인의 아이디어에 대해 만족해 하며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라벨을 매년 바꾸는 거야. 와인은 매해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알맞은 예술가들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디자인을 맡길 거야. 그리고 라벨 디자인에 대한 대가로 와인을 주어야지. 예술을 위한 와인, 와인을 위한 예술이 아닌가.’

화가들은 작품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받는 대신 자신이 그린 라벨의 빈티지를 포함한 다른 한 해의 샤토 무통 로칠드를 받으며, 이제까지 이러한 ‘명예로운 거래’를 거부한 화가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흔히 위대한 와인을 만드는 것을 예술 작품에 비유하지만 와인과 예술의 접목을 실행한 사람은 필립 남작이 최초였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보르도의 와인 세계는 완전히 변했다고 평한다.


118년의 기다림

1973년은 샤토 무통 로칠드가 1등급으로 승격된 해다. 로칠드 가문이 무통을 매입한 지 120년, 1853년 와인 등급체계가 발표된 지 118년 만이었다. 필립 남작이 와인의 샤토 병입을 추진하여 보르도 와인 업계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후, 1등급 샤토들은 무통을 따돌리기 시작한다. 가장 크게 훼방을 놓은 곳은 같은 로칠드 일가인 라피트였다. 필립 남작은 무통을 1등급으로 올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 본인이 무통에 정착한 지 51년 후 1등급으로 승격되는 것을 보게 된다.

필립 남작에 의하면 로칠드 가문의 사람으로 1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1등은 될 수 없었고, 2등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무통이다’라고 섭섭함을 표시했던 문구는 ‘이제 1등이 되었고 예전에는 2등이었으나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바뀌었다.

바롱 필립은 1등급으로 승격된 1973년 빈티지의 라벨은 피카소여야 된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그의 그림을 얻게 된다. 당대 최고의 화가와 1등급이 된 샤토 무통 로칠드의 조화는 누가 생각해도 극적인 만남이다. 1973년은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여 라벨에 ‘피카소를 추모한다’는 글귀가 들어 있다.


예술적인 건축물 ‘와인 저장고’와 최초의 와인예술박물관

1924년 와인의 샤토 병입을 선언하여 생산자가 직접 와인숙성을 담당하게 되면서, 필립 남작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길이 110m에 달하는 아름다운 와인 저장고를 만들게 된다. 기둥이 없이 설계된 와인 저장고에 수많은 오크통이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광경을 보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이후 세계 모든 유명 와이너리들은 앞다투어 자기들만의 저장고를 건축했고 양조장은 관광 명소가 됐다.

필립 남작이 와인의 세계에서 또 한번 최초를 기록하게 되는 것은 1968년 와인예술박물관의 개관이었다. 수 세기에 걸친 와인과 관련된 예술작품뿐 아니라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 원화를 전시하는 와인예술박물관의 건립으로 보르도의 작은 마을이었던 포이약은 관광객들로 들끓게 됐다. 처음에 이웃의 와인 생산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오늘날 보르도가 와인 관광의 명소가 된 것은 필립 남작과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봄 ‘실크셔츠를 입은 농부’ 필립 남작은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삶을 사랑했고 여인을 사랑했으며 시인이었고, 카 레이서였으며 무엇보다 뛰어난 와인 메이커였다. 1987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은 스위스 화가인 한스 에르니가 포도 송이 사이에 필립 남작의 얼굴을 그렸고, 그의 무남독녀 외딸인 필리핀 남작 부인이 친필로 ‘무통의 혁신자인 나의 아버지 필립 드 로칠드 남작에게, 그의 65번째이자 마지막 수확인 이 빈티지를 헌정한다’라고 썼다. 필리핀 남작 부인은 서명과 함께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mouton ne change)’라는 문구를 따로 넣은 것을 보면 아버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딸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무통의 여주인 - 필리핀 드 로칠드 남작 부인
필리핀 남작 부인이 가문을 빛낸 조상들에게 헌정한 와인들.
왼쪽부터 바롱 앙리(메독), 바롱 칼(생테밀리옹), 바롱 나다니엘(포이약), 바론느 샤를로트(그라브), 바론느 폴린(소테른)

  프랑스 와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필리핀 남작 부인은 아버지의 말년에 무통의 라벨 선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1981년 필리핀은 처음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이 그린 샤토 무통의 라벨 전시회를 기획했다. 1945년부터의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의 원화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세계 순회 전시회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포함된 유례가 없는 이 전시회는 샤토 무통 로칠드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해가 갈수록 샤토 무통의 라벨을 그릴 예술가의 선정은 중요한 일이 되었으며 필리핀 남작 부인은 이 일을 주도했고, 세계적인 이벤트나 홍보 행사에 참여했다.

1988년 필립 남작이 86세로 타계하자 연극 배우로 활동하던 필리핀은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다마이약 및 샤토 클레르 미용 및 무통 카데, 미국 최고의 와인 오푸스 원을 생산하는 바롱 필립 드 로칠드社(사)의 주인이 되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무통 카데로 칸 국제영화제를 후원하고 있으며, 조상들을 기념하기 위한 헌정와인 시리즈를 만들고, 칠레의 최고 와인인 알마비바, 에스쿠도 로호 등은 그녀의 작품이다.

바로네스는 매력과 천부적인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 그녀는 정열적이며 사업적인 수완과 함께 따스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녀는 군중 속에도 돋보이며 어디를 가나 유명인물로 환대 받는다. 70세를 넘긴 지금도 놀라운 정열로 일하고 있다. 은퇴를 고려하고 있지 않으나 그녀는 자신의 두 아들이 훌륭히 가업을 승계할 것으로 믿고 있다. 로칠드가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사교계의 꽃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가난한 연극쟁이들과 생활하면서 돈의 의미와 인생을 배웠다고 했다.

“사람은 가문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신이 한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고 한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녀가 바로 로스차일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무통이 너무 커져서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네스는 샤토 무통 로칠드가 최고를 추구하는 로칠드의 정신과 함께 언제까지나 가문의 유산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샤토 무통 로칠드, 명화를 라벨에 담은 와인

바롱 필립에게 최고의 맛을 지닌 샤토 무통 로칠드는 당연히 아름다워야 했다. 1945년 이래 세계의 유명한 현대 화가들의 오리지널 작품이 라벨 디자인에 사용되고 있으며, 샤토 무통 로칠드 컬렉션은 현대 회화 걸작선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롱 필립은 또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을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매년 세계 유명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했다. 1945년부터 샤토 무통 로칠드의 라벨 컬렉션을 보면 달리, 세자르, 샤갈, 칸딘스키, 피카소, 앤디 워홀 등 현대 회화의 거장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와인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신념은 로칠드 가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화가와 무통 소유자와의 관계는 우정과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상호간의 독자성을 서로 인정하고 있다. 즉 모든 화가는 와인,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 또는 가문의 문장인 무통(ram)을 주제로 자신의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작업을 하며, 무통은 작품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거부할 수 있다. ⊙


▣ 샤토 무통 로칠드의 명화 라벨에 대한 몇 가지 질문
Chateau mouton rothschild 1993. 발튀스의 소녀 누드 그림이 삭제된 채 출시된 라벨.

  ―라벨은 화가만 그릴 수 있나?

라벨의 그림을 그린 사람들 중에서는 화가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유명인들을 보면 조각가인 헨리 무어가 1964년, 세자르는 1967년 라벨을 그렸고 영화감독 존 휴스턴은 1982년 라벨을 찰스 황태자가 英佛(영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 라벨을 이탈리아의 설치 미술가인 주세페 페노네가 2005년 라벨을 그렸다.

예술가의 그림으로 라벨을 만들지 않은 해도 있다. 1953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100주년 기념 라벨로 나다니엘 남작의 초상화를 넣었다 1977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母后(모후)가 보르도를 방문하여 무통에 머문 것을 기념하기 위한 라벨 2000년 21세기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병에 가문을 상징하는 아우구스부르그의 양을 새겨 넣어 병 자체를 예술품으로 만들었다 2003년 샤토 무통 로칠드의 150주년 기념 라벨로 나다니엘 남작의 사진을 넣었으며 밑바탕은 샤토 매입 시 계약서다.

스캔들을 일으킨 라벨도 있다. 1993년 발튀스의 소녀 누드화는 미국 시장에서 큰 스캔들을 일으켰고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으며, 필리핀 드 로칠드 남작 부인은 미국에 수출된 1993년 빈티지를 모두 수거하여 아무 그림도 없는 라벨을 붙여 보냈다. 현재 그림이 없는 1993년 무통은 애호가들의 수집 대상이다.

두 가지 다른 그림으로 라벨을 만든 해도 있다. 1978년 빈티지로 캐나다 화가 장 폴 리오펠은 두 가지의 그림을 필립 남작에게 보여주었고, 둘 다 마음에 든 남작은 생산량을 반씩 나누어 다른 라벨을 붙였다.

―동양 화가들은 몇 명이나 그렸나?

1945년부터 2008년 12월 출시된 2006년까지 총 62개 빈티지 중 화가가 그리지 않은 4개 빈티지를 빼면 총 57명의 화가가 그림을 그렸으며, 동양 화가는 총 3명(1979년 일본 화가 히사오 도모토, 1991년 발튀스의 부인인 일본 화가 세추코, 1994년 중국 화가 구관)이다.

―여류화가들은 몇 명이나 그렸나?

총 57명 중 6명이다(1948년 마리 로랑생, 1952년 레오노르 피니, 1965년 도로테아 태닝, 1968년 보나 티베르텔리, 1991년 세추코, 1997년 니키 드 생팔).

―아트 라벨은 와인의 가격에 영향을 미칠까?

대답은 No & Yes다. 와인의 가격은 화가의 명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빈티지의 좋고 나쁨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트 라벨은 무통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빈티지가 나쁜 해의 와인은 시장에서 일찍 사라지고 가격 형성이 되지 않지만 무통의 경우 마니아들은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1945년부터 샤토 무통 로칠드를 모두 소장한다는 것은 마니아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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